파라과이에는 우정의 날이 있다. 말 그대로 친구들이나 동료들과의 우정을 기념하는 날인데, 한국에는 없는 개념이라서, 조금은 생소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기념일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획을 긋는 사건들을 기념하거나, 어린이날, 어버이날과 같은 가정에 초점이 맞춰진 날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공휴일 아닌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날들은 사랑을 노래하는 날들이 대부분이고.
파라과이에서 우정의 날은 학교에서 기념행사가 있을 정도로 큰 날이다. 그렇다고 막 거창한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고, 학급별로 친구들끼리 선물을 주고 받거나,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Felicidades (축하해)' 하며 말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학교 어린이날 같은 느낌이다. 여기는 친구라는 개념이 한국과는 달리, 나이가 같다는 개념 이상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서양국가들이 그러하듯 ),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도 서로의 우정을 주고 받는 작은 선물을 하거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 모습을 보노라면 뭔가 참 묘한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카리스마 선생님을 꿈꾸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
< 축하도 조금 요란하게, 볼을 맞대며! 축하해! >
도서관에서 책들을 정리하며, 어느 때와 같이 있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도서관에 들어 닥친다.
' 선생님 축하해요! '
' 선생님 정말 정말 축하해요! '
우정의 날 인사를 해주러 온 아이들이다. 이리 잊지 않고, 구석에 쳐박혀 일하고 있는 선생님을 챙겨주니 마음이 찡한 것이 너무나도 고맙다. 파라과이에 있으면서 사소한 것에 섭섭하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참 나도 이 곳에 점점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우정의 날 케이크를 맛깔나게 먹고 있는 꼬맹이들. 얼굴에 생크림 잔뜩! :) >
그렇게 왁자지껄한 오후가 지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귀가할 때쯤, 4학년 교실에서 선생님들끼리 작은 자리를 가졌다. 7월 30일. 우정의 날을 위해 선생님들끼리 서로 축하의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모임은 급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달 전부터 준비된 자리었는데, 교장선생님말로는 나름 학교 선생님들이 기대하는 행사 중의 하나라고 귀뜸해주었다. 그 이유는 이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행사때문인데, 그 이름하여 선물 교환식되겠다. 아이들이 서로의 우정을 나누며 조그마한 선물을 나누는 것과 같이 선생님들끼리도 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다 또 다른 재미요소가 있다. 선물을 받기 직전까지 누가 자신의 선물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뭘 준비했는지를 철저하게 모른다는 것이다. 일종의 마니또 같은 것으로, 누가 누구에게 선물을 할 지는 한달 전 제비뽑기를 통해 정했었다.
아이들의 책상을 모아, 커텐보로 나름 그럴싸에 꾸미고, 엔빠나다(만두), 케이크 그리고 탄산음료까지. 선생님들이 하나둘 모이자, 서로 기도를 하고 교장선생님의 축하인사로 소박하지만, 즐거운 모임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 돌아가며, 마니또 공개의 시간을 가지고 선물을 주고 받는다. 내 선물을 받을 럭키가이는 우리학교 유일한 남자 평교사인 알미데스 선생님이었는데, 평소의 올림피아(파라과이 국내리그 축구팀) 광팬인 그를 위해 친히 수도까지가서 그의 선물을 준비했다. 그를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선물. 두두둥 올림피아 츄리닝 자켓되겠다.
< 내 야심작. 올림피아 츄리닝 자켓! :) 익살스런 모습의 알미데쓰 선생님을 진지하게 만들었던! >
올해 처음 우정의 날을 맞이한 외국인교사가 과연 무엇을 준비했을까 호기심반 기대반으로 쳐다보던 선생님들.. 준비한 선물의 포장이 하나하나 뜯어지는 알미데쓰 선생님의 손가락에는 긴장감마져 서려있었다. 드디어 위용을 들어내는 내 야심작!. 자켓에 박힌 올림피아 마크를 보이자, 갑자기 알미데쓰 선생님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자켓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평소에 너무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고( 난 이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역시나 올림피아 광팬이던 교장선생님은 자켓을 보자마자 자신도 혹하는지, 행사를 진행하다 말고, 저 자켓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얼마인지, 자켓의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자켓이 팔던 가게와 그 가격까지 솔솔 떨린 나. 그러고 한창을 올림피아의 위엄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은 뒤에야 다시 진행되는 오늘의 우정의 날 행사였다.
그릇에서 부터, 가방, 티셔츠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형까지. 선물들이 개봉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오고 갔다. 하지만 엔빠나다 한 입물며, 금새 다시 깔깔대며 웃는 우리들. 즐겁다. 한국에서의 어느 때와 많이 닮아 있는 것이, 괜히 친구들 생각도 난다.
한국에서 이런 우정의 날이 있으면 어떨까? 오늘처럼 이렇게 소박하게 웃으면서 즐겁게 깔깔대며 밤을 지샐 수 있을까? 왠지 한국에서 굉장히 그리워질 풍경이 될 것 같다.
< 내가 받은 우정의 날 선물. 나에게 정열의? 붉은 색이 잘 어울린다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던 펠리시아쌤 >
< 소박하지만, 그리고 소박하지만도 않은 우정의 날 만찬 >
< 학교 선생님들과 다같이 찰칵! 앞의 선물들이 오늘이 우정의 날임을 알 수 있게해준다. 아.., 저 분홍색 인형 어쩔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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