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tiqueta [:스티커]
수업은 전쟁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늘 수업은 전쟁과도 같았다. 종이 디디딩 하고 울리면 출석부와 교과서를 들고 결전의 자세로 교실로 들어 간다. 그리고 교실 앞문을 팍! 열고 기합을 다해서, '반장 인사' 하고 무표정하게 말한다. 그리고 인사를 기계적으로 받은 후, 아이들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명 한명 주시하면서 본 뒤, 반동 분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교과서를 편다. 그리고 수업을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수업을 조금은 안정된 분위기에서 이끌어 갈 수 있다. 분위기 환기? 이라 해야하나 아님 기선 제압? 이라고 해야할까. 뭐 나름의 수업 기술이라면 수업 기술이다. 근데, 여기 파라과이에서는 이러한 나의 전쟁 기술이 잘 먹히지 않는다. 내 수업 기술은 내전용인가? 국제전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여기서 수업도 수업 종과 함께 시작된다. 한국에서의 수업 종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디디딩?의 멜로디와 같다면, 여기서의 수업종은 조그마한 구세군 종이다. 아니 한 겨울의 찹쌀떡 종이라고 해야하나? 여튼 조금은 인간적인 이 종을 4학년 한 꼬맹이가 교실 밖으로 튀어나와 Es hora!!(시간되었어!!!)하고 외치면서 흔들면 수업이 시작된다. 나는 이 종소리를 듣고, 선생님과의 떼레레 타임을 마친 후, 교실 문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없는 교탁을 형상화 한 후, 가운데에 서서 크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Buenas tardes para todo!!(모두들 좋은 점심이야!!) 하고 외친 후 기계적으로 인사를 주고 받고,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수업 준비부터 확인한다. 하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한국과 다르게 파라과이 우리 교실에선 이 때부터 수업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정돈된 책상, 준비된 자세, 조용하며 교사의 발문에 집중하는 분위기.... 수업 시작 전부터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내 권위와 카리스마도...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마을 회관에서 미술 좀 하는 동네 형아가 그림 그리기 교실을 연 듯한 그런 분위기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난이도 있는 수업이라도 해볼라치면 더더욱 수업은 산만해지니 이것 참 환장할 노릇이다. 여기저기서 반란군이 생기고, 나는 어버버한 중세시대의 스페인어로 반란군을 진압하긴 커녕, 한번 해보자며 협상하기에 바쁘다. 점점 아이들의 협상단가는 높아지고,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중세 갑옷을 입은 것 마냥 너덜너덜 힘들게 패잔병처럼 교실문을 기어 나온다.
수업만 하면 만신창이처럼 나오니, 늘 수업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 날도 어느 날처럼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문득 한국에서 효과가 좋았던 수업 운영 기술이 생각난다. 바로 칭찬통장 제도 였다. 이름하여 El cuaderno de elogio. 한국의 칭찬 통장 스페인어 버전이었다. 이 것은 내가 적들을 섬멸하고 나를 따르게 만들 비장의 무기가 되리라! 칭찬 통장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각각 20칸으로 이루어진 빈칸에, 과제를 성실하게 하거나 수업 태도가 바른 학생들에게
스티커를 하나씩 준다. (물론 스티커는 이쁜 것으로, 반짝이는 것이면 더욱 좋다.)
2) 스티커를 일정 이상 모으면 선물과 같은 유인가를 제공한다.
이런 단순한 제도에 아이들을 열광한다. 아이들이 이쁘고 화려한 것을 모으기 좋아하는 심리도 한 몫하겠지만, 다 모은 뒤에 커다란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아이들의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나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디자인부터 칭찬통장이라는 선진 문물을 설명하기 위한 스페인어 설명서까지 칭찬통장 만들기에 착수했다.
< 한국 칭찬 통장에서 고안한 스페인어판 칭찬 통장, 컴퓨터 솜씨가 없어서 좀 허접하다. >
만드는데 얼마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림도 넣고, 배치도 이리저리 해보고, 색도 이리저리 바꾸면서 좀 이쁘게 만들려고 하니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오후에 시작한 작업이 해가 뉘엿뉘엿 질때쯤이야 끝이 난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만들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이로 인해 아이들이 변화하고 무엇보다 즐거워 할 생각을 하니 뿌듯해졌다. 그리고 운명의 날, 칭찬 통장을 아이들에게 설명하면서 하나하나 나누어주는데, 어찌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지, 이 때까지만 해도 오늘 하루는 내 파라과이 수업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에피소드 없이 지나갈 평온한 수업이 될꺼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질문하기 전까진.
'선생님, 이거 뭐예요?'
실컷 설명을 끝나고, 잘 알아들었지? 라는 질문을 한 뒤, SIIIIIIIIIIIIIIIIIIIIIIII(네!!!!!!!!!!) 라는 확답을 받은 직후, 나온 첫 질문이었다. 그럼 알아들었냐고 물어볼 때 '네!!!'라고 라도 대답하지 말던가. 제일 크게 대답한 녀석이 저런 질문을 하니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것은 뭐가 되는건가...
- 내가 설명했잖아, El cuaderno de elogio!
아이는 그러니깐 그게 뭐냐고 물어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초롱초롱한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티커에만 고정하고, 내 이야기는 듣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바빴으리라.... 한 숨을 한번 내쉬며 다시 한번 설명할 준비를 한다.
' Elogio가 뭔데요? '
설명을 시작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갑자기 스페인어 수업에서나 나올만한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오니 당황스럽다; 외국인이다 보니, 외국어로 외국어의 뜻을 설명하는 일이 가끔 있으나 늘 쉽지 않다. Elogio는 분명 사전에 칭찬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혹시 여기에서 안쓰는 단어인가? 별의 별 생각과 다시 떠오른다. 가끔 사전에 있는 단어 중에서는 (영어도 그렇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많다. 더군다가 스페인어에서는 남미와 스페인 본토가 쓰는 단어가 다른 경우도 많고, 같은 단어라도 해도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가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아, 수업 들어오기 전에 선생님들께 Elogio에 대해서 좀 여쭤나 볼껄... 늘 수업 전에 한번 씩 단어나 문법에 대해 여쭈어보는데, 오늘은 칭찬통장에 들떠서 떼레레만 실컷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후회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애들 앞에서 이 것때문에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잘 모면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되물어 보기로 했다.
- Elogio가 뭘까? 한번 이 친구에게 설명해 볼 수 있는 친구?
이 수많은 꼬맹이들 중에 다른 꼬맹이들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아이가 분명 있으리라...나름 성공적인 대처라고 생각하면서, 빨리 누군가가 설명해보거라 하고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어쩜 이런 임기응변을 했을까 자신에게 Elogio를 해 가면서. 근데 학급 분위기가 조용한 것이 심상치 않다. 왜 우리 똑똑한 루까쓰는 이렇게 조용하고, 우리 어른스러운 디에고는 왜 오늘따라 저런 맹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활달한 우리 밀리안은 왜 손을 안들고 날 저렇게 올려다 보기만 할까..... 오늘따라 더욱 애절한 눈빛으로 설명 좀 해라 하고 아이들 하나하나 쳐다보지만, 정말 다들 모르는 눈치다.
망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어쩔 수없이 나는 한명의 아이를 불러 세운 후, 커다란 몸짓으로 Elogio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때는 교사의 권위고, 카리스마고 뭐고 없는 거다. 아, 이 방법은 정말 아이들 앞에서만은 사용하기 싫었는데...
- 디에고, 열심히 공부하는 척해봐
디에고는 멍하게 허공에 대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시늉을 한다.
- 아이고, 우리 디에고 정말 이쁘다. 그림도 잘그리는구나. 우리 이쁜 디에고
나는 디에고를 보면서 정말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디에고 머리를 만지작 만지작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들은 이미 Elogio에 대한 설명에는 관심이 없고, 여전히 멍하게 웃고 있는 디에고와, 옆에서 그에게 사랑 듬뿍 담긴 몸짓을 표현하는 광대같은 선생님의 모습에 그져 깔깔거리며 웃으며 좋아한다.
- 이게 바로 Elogio 야, 알겠지? 얘들아?
'네!!!'
아...몸짓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는데...그럼 권위가 더 떨어져서 이제 동네 형에서 동네 친구로 전락할꺼같아.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때만큼은 아이들의 대답이 훨씬 크고 집중도 잘한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나 또한 기분이 좋다. 나는 씩 하고 웃으면서 다시 칭찬통장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 내가 수업 시간에 과제 열심히 하는 사람, 혹은 조용히 수업 태도 좋은 사람에게 스티커를 줄꺼야. 그럼 여기 빈칸에 하나하나 붙이면돼. 여기 칸을 스티커로 다 채우면 내가 근사한 선물을 줄꺼야
' 오오!! 선물이 뭔데요?!! '
근사한 선물이라는 말에 눈이 한번 더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아까는 스티커에 열광하더니 이젠 멋진 선물이라니 아이들이 두배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 그런 비밀이야. 선물을 받을 사람만 알 수 있어. 여기 칸이 몇 개지?
' 20개요!! '
- 그럼 몇개의 스티커를 모아야 할까?
' 20개요!! '
근사한 선물이란 단어가 주는 힘일까? 아이들의 대답이 평소보다 2배는 더 큰거 같다.
- 좋았어! 잘 할 수 있지? 한번 오늘부터 스티커를 모아보자.
' 선생님 전 20개 다 모으면, 자동차 사주세요.'
' 전 오토바이요!'
' 전 비행기요!'
아이들은 선물을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자기들끼리 나는 20개 모으면 무엇을 받을꺼라며 들썩들썩인다. 아이들 선물로 한국에서 가져온 조그마한 2천원짜리 열쇠고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동차네, 오토바이네, 심지어 비행기까지 나오니 괜시리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다른 걸로 바꿔야 하나 하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도 하지만, 일단 20개 다 모으는 아이들이 나타나면 생각해보자며, 다시 생각을 접고, 결국에는 열쇠 고리도 정말 좋아할 것이라 확신하며 다시 수업을 시작한다.
- 일단 모으고, 생각하자. 아주 근사한 선물이 될꺼야.
실제로 이 칭찬 통장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여 내 수업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로 올라서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수업이 산만하고 떠들고 장난 치는 아이가 있어도, 화를 내거나 직접적으로 혼을 내지 않고도, 조용한 아이들에게 스티커를 주는 방법으로 수업 분위기를 다시 정돈할 수도 있었고, 더 열심히 과제를 수행한 아이에게 더 많은 스티커를 줌으로써 아이들이 과제를 하는데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외재적 동기라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내 미술 시간은 한결 여유롭고 유쾌해졌다.
나는 더이상 패잔병이 아니다.
< 이제 수업 시간에 카메라를 들어도, 과제에 집중할 정도로 수업이 안정화 되어 있다 :-) >
< 칭찬 통장의 힘, 과제를 다 완수하면 스티커 한개가 부여된다. 종례 후에도 과제를 계속 하기 위해 남아 있는 아이들이 몇몇있다. 종치면 가기 바빴던 전에 비하면 이러한 변화는 굉장히 고무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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